프리드리히 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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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돌만은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99년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 참모부에서 근무했으며, 다양한 훈장을 수훈했다. 전간기에는 여러 부대에서 지휘관을 역임하며 1936년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제7군 사령관을 맡아 프랑스 침공에 참여했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셰르부르 함락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군사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자살했다. 사후 오크 잎 기사 철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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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돌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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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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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2년 2월 2일 |
출생지 | 뷔르츠부르크, 독일 제국 |
사망일 | 1944년 6월 29일 |
사망지 | 르망, 프랑스 |
안장 장소 | 샹피니-생-탕드레 독일 전쟁 공동묘지 |
별칭 | (없음) |
군 복무 정보 | |
소속 국가 | |
복무 기간 | 1899년 - 1944년 |
최종 계급 | [[File:Generaloberst (Wehrmacht) 8.svg|25px]] 상급대장 |
소속 군 | |
지휘 | 제7군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오버로드 작전 |
훈장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
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82년 독일 제국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47] 1899년 독일 육군에 입대하였으며,[3] 1909년부터는 참모대학에서 공부하였다.[3]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독일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포병 대대를 지휘했다.[47] 1917년에는 제6보병사단 참모부로 배치되었다.[47] 전쟁 기간 동안의 공로로 2급 및 1급 철십자 훈장, 검(劍)이 부착된 바이에른 군사 훈장, 2급 바이에른 공로 십자 훈장 등을 수훈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다양한 포병 부대의 지휘관을 거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인 1923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10월, 돌만은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7] 1940년 프랑스 침공 작전에 참가하여 제7군을 지휘했으며, 스트라스부르 점령과 마지노 선 프랑스군 포위에 기여한 전공으로[15] 1940년 6월 24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하고 7월 19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16]
3. 제1차 세계 대전
4. 전간기
나치 독일 시대가 시작된 후에도 그의 군 경력은 계속되었다. 1932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이듬해인 1933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3년 2월 1일, 그는 국방부 포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934년 10월에는 육군 군수 사령부 카셀의 지휘관으로 잠시 근무한 뒤, 1935년 5월 1일 제9 군관구(헤세-튀링겐 서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 그는 두각을 나타내어 1936년 말, 다른 11명의 장교들과 함께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7]
돌만의 나치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일부는 그가 때때로 친나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열성적인 당원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8] 반면, 역사가 클라우스-위르겐 뮐러는 돌만의 명령에서 분명한 나치적 추진력이 드러난다고 지적하며, 그가 알려진 것보다 국가사회주의에 더 강하게 경도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 실제로 1935년 2월 8일자 돌만의 지시는 그가 장교들에게 NSDAP 당국과의 전적인 협력을 지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모든 장교들이 나치당을 지지하고 그에 따라 의견을 조정하도록 요구했다는 증거도 있다. 그는 심지어 장교들의 부인들이 국가 사회주의 여성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하게, 돌만은 장교들이 사무실과 식당에 카이저의 사진 대신 퓌러의 사진을 걸 것을 기대했다.[10] 1937년에는 가톨릭 군종 신부들에게 나치 정권에 대한 지지가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다고 질책하며, Wehrmacht의 일원이자 국가 사회주의의 전달자로서 항상 "퓌러, 국가, 그리고 국민에 대한 명확하고 흔들림 없는 인정"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11]
1939년 8월 25일, 돌만은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다. 15 보병 연대에서 소위 계급을 열망했던 돌만의 외아들은 이 작전 중에 사망했다.[12]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년간 제7군과 함께 프랑스 북부에 주둔하며 르망에 사령부를 두고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역의 해안 방어를 담당했다. 그러나 직속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전략에 따라 해안 방어 강화에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으며,[16][18] 1943년 12월 에르빈 롬멜 원수 부임 이후에야 방어 강화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19] 점령 기간 동안 돌만은 프랑스 문화에 관심을 보였으나 우울증과 건강 악화도 겪었다.[21][19]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개시 당시, 돌만은 렌에서 열린 병기 연습 참가로 부재중이어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29] 제21 기갑 사단을 동원한 즉각적인 반격 시도는 연합군 공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고 실패로 돌아갔다.[19][30] 이후 노르망디와 셰르부르를 둘러싼 3주간의 격전에서 제7군을 지휘했으나,[32] 6월 26일 셰르부르가 함락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돌만의 책임을 물어 군사 재판 회부를 위협했다.
1944년 6월 28일(혹은 29일), 돌만은 사령부에서 사망했다. 공식 기록은 심장 발작이지만,[1][37][2] 당시 참모장 막스 요제프 펨젤은 자살이라고 증언하는 등[1][37][2][38]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히틀러는 돌만 사망 후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 7월 2일 장례식에서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추서했다.[40] 제7군 지휘는 무장친위대의 파울 하우서 상급대장이 이어받았다.
5. 1.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10월,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부대인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5. 2. 프랑스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인 1939년 10월, 돌만은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3]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돌만이 지휘하는 제7군은 지크프리트 선 남단에 배치되어 프랑스의 마지노 선과 마주했다.[13] 마지노 선은 과거 정면 공격에 대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으나, 히틀러는 침공 계획에서 이 방어선을 쉽게 우회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크게 개의치 않았다.[14] 침공 초기 제7군은 주력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프랑스군이 격파된 이후 공격에 투입되었다. 제7군은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하고 북쪽에서 진격해 온 구데리안의 기갑군 예하 제1기갑사단과 연결되어 보주 산맥에서 약 40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위했다. 이 작전 이후 프랑스는 항복했다.[15]
이러한 전공으로 돌만은 1940년 6월 24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으며, 히틀러는 작전에 참여한 다른 장군들과 함께 돌만에게도 진급으로 보상하여 1940년 7월 19일 상급대장 계급으로 승진시켰다.[16] 이후 돌만은 4년 동안 제7군과 함께 프랑스 북부에 주둔하며 르망에 사령부를 두었고, 제7군은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5. 3. 프랑스 점령기
프랑스 패배 이후 돌만이 지휘하는 제7군은 프랑스 서부에 주둔하며 르망에 사령부를 두었다. 돌만은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와 함께 서부 전역의 사령관 중 동부 전선에서 소련에 대항하여 복무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역사가 페터 리프는 돌만이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동부 전선에서의 작전에 기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측한다.[17]
돌만은 현대적인 전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점차 자만심에 빠지고 과체중이 되었으며, 직속 상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해안 방어를 소홀히 했다.[16] 룬트슈테트는 연합군이 상륙하여 병력을 증강시킨 후 내륙으로 진격하기를 기다렸다가, 전격전 방식으로 이들을 격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통해 연합군 해군 포격의 사정거리 밖에서 독일군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았다.[18] 이 전략에 따라 돌만과 룬트슈테트는 4년 동안 프랑스 해안 방어선 강화에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943년 12월, 돌만의 지휘권이 B 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 원수의 감시 하에 놓이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돌만은 롬멜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해안 요새를 개선하기 위한 건설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19] 돌만의 참모장은 방어 강화 노력이 상부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0]
점령 기간 동안 돌만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즐기려 했으며, 자주 종교 예배에 참석하고 대성당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술과 시가를 과도하게 탐닉하며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21] 그의 건강 악화는 현대 전술과 제공권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가오는 노르망디 상륙에 대한 대비 부족으로 나타났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만은 경험 많은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연합군 보고서에서는 그를 "방어 전문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서부 기갑 집단 사령관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훗날 돌만이 기갑 부대 운용에 대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22] 그러나 결과적으로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을 막아내기에 독일군의 방어 태세는 역부족임이 증명되었다.[23]
5. 4. 노르망디 상륙작전
1939년 10월, 돌만은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7] 1940년 프랑스 침공 작전에 참가하여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하고 마지노 선에 갇힌 프랑스군을 포위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6월 24일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고, 7월 19일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4년 동안 제7군은 프랑스 북부에 주둔하며 르망에 사령부를 두었고,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독일군은 리비에라에서 북해까지 3000km에 달하는 해안선을 방어해야 했으나, 병력은 부족했고 다양한 국적(코사크, 볼가 타타르, 조지아인 등)의 병사들이 프랑스,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어 전력이 불안정했다.[24] 대서양 방벽 역시 일부 구역만 잘 건설되었을 뿐 전반적으로 미흡했으며, 해안 포격 지원 능력도 신뢰하기 어려웠다.[25]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 임박했을 때, 독일군 지휘부는 연합군의 기만 작전에 속아 주력 공격이 칼레 방면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26] 상륙 며칠 전부터 해협 건너편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 보고가 있었지만, 이는 OKW나 돌만의 제7군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27] 설령 정보가 전달되었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파 드 칼레 공격을 확신했기에 병력 재배치가 이루어졌을지는 미지수다.[28]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최대 13만 명의 병력과 2만 대의 차량이 해군 포격의 엄호 아래 상륙했다.[28] 공교롭게도 이날 돌만은 렌에서 열린 병기 연습(지도 전쟁 게임)에 참가 중이었고, 예하 군단 및 사단 지휘관들도 자리를 비워 신속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29] 돌만은 제21 기갑 사단을 동원해 즉각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사단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중장은 주간 기동이 연합군 공군의 좋은 표적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돌만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강행했지만,[19] 이는 큰 실수로 드러났다. 연합군 공군은 밤사이 독일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조명탄을 이용해 제21 기갑 사단을 공격하여 탱크 5대, 탱크 트럭 40대, 기타 차량 84대를 파괴하는 큰 피해를 입혔다.[30] 이로 인해 에르빈 롬멜이 제대로 된 반격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6월 9일이 되어서였다.[31]
돌만의 제7군은 16개 이상의 사단과 5개 군단 지휘부로 구성되어 침공 전선의 좌익을 담당했지만, 병력과 보급품 부족으로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32] 돌만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처벌 위협을 통해 병사들의 규율을 유지하려 애썼다.[33] 독일 최고 사령부는 부정확한 정보와 히틀러의 오판으로 인해 예비 병력(5개 공군 사단, 2개 기갑 사단, 24개 보병 사단)을 제때 투입하지 못했고, 오히려 롬멜과 룬트슈테트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대규모 기갑 반격을 명령했다.[34]
노르망디와 셰르부르를 둘러싼 3주간의 격전 끝에, 히틀러는 셰르부르를 요새로 선포하고 마지막 한 명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돌만은 이 명령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셰르부르 수비 병력을 제7군 본대에 합류시켜 철수시켰다. 6월 26일 미국군이 셰르부르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돌만 등 지휘관들의 책임을 물어 군사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다.
1944년 6월 28일, 돌만은 히틀러에게 전보로 해명한 후 사령부에서 사망했다. 참모장 막스 요제프 펨젤 중장은 돌만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자살했다고 증언했으나, 공식 기록에는 심장 발작으로 인한 급사로 기록되었다. 돌만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 7월 2일 장례식에서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을 추서했다. 궤멸 위기에 처한 제7군의 지휘는 무장친위대의 파울 하우서 상급대장이 이어받았다.
5. 5. 셰르부르 함락과 죽음
프랑스의 항구 도시 셰르부르는 1944년 6월 26일, 카를-빌헬름 폰 슐리벤 중장이 미국군에게 항복하면서 함락되었다. 이는 히틀러를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빌헬름 카이텔 원수에게 군사 재판을 위한 조사를 지시하게 했다. 히틀러는 1944년 6월 28일,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돌만을 베르히테스가덴으로 소환하여 돌만을 군사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룬트슈테트는 돌만의 책임이 자신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를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돌만의 지휘권 해임을 요구했으나, 이번에는 에르빈 롬멜이 돌만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룬트슈테트와 롬멜이 떠난 후 돌만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무장 친위대의 파울 하우서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35] 히틀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룬트슈테트 역시 지휘권을 해임했다.[36]
자신의 해임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돌만은 계속되는 전투와 압박감 속에서 극심한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1944년 6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심장 발작으로 급사했다고 되어 있지만,[1][37][2]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독극물을 복용하여 자살했다고 주장한다.[1][37][2] 돌만의 마지막 참모장이었던 막스-요제프 펨젤 중장은 1973년에 남긴 기록에서, 돌만이 6월 29일 새벽 3시경 참모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지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증언했다.[38] 2003년에는 롬멜의 경우처럼 돌만 역시 히틀러에 의해 자살을 강요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39]
돌만의 장례식은 1944년 7월 2일 프랑스에서 거행되었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에르빈 롬멜, 후고 슈페를레 원수가 참석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돌만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 그에게 사후 참나무 잎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고 칭찬하는 내용의 부고를 발표했다.[40] 그는 현재 샹피니-생탕드레 독일군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궤멸 직전에 놓인 제7군의 지휘는 파울 하우서가 이어받게 되었다.
6. 훈장
- 철십자 훈장 (1914년)
- * 2급 (1914년 9월 18일)[41]
- * 1급 (1916년 2월 22일)[41]
- 왕자 섭정 루이트폴트 메달 (바이에른, 1905년)
- 근속 훈장, 2급 (바이에른)
- 군사 공로 훈장, 칼이 달린 4급 (바이에른, 1914년 11월 16일)
- 1914/1918 세계 대전 명예 십자 훈장 (1934년 12월 21일)
- 국방군 근속 훈장, 4급에서 1급
- 철십자 훈장 부장 (1939년)
- * 2급 (1939년 12월 11일)[41]
- * 1급 (1940년 3월 10일)[41]
- 기사 철십자 훈장, 오크 잎
- * 1940년 6월 24일, 포병 대장이자 제7군 사령관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42][43]
- * 1944년 7월 1일, 상급대장이자 제7군 사령관으로 518번째 오크 잎 수여 (사후 추서)[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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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Generalprobe für die Beseitigung Rommels. Ist Friedrich Dollmann, der Oberbefehlshaber der 7. Armee, am 28. Juni 1944 auf Weisung Hitlers ermordet worde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003-08-19
[40]
서적
Hitler's Commanders: Officers of the Wehrmacht, the Luftwaffe, the Kriegsmarine, and the Waffen-S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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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997
[42]
문서
2000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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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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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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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teel Inferno
Dell Publishing
1997
[46]
서적
Decision in Normandy
Penguin Book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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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Konventioneller Krieg oder NS-Weltanschauungskrieg. Kriegführung und Partisanenbekämpfung in Frankreich 1943/4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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